마로면 관기리에 거주하는 한정식(73)씨의 이야기는 보은에서 오랫동안 미용봉사를 하는 심다영씨로부터 들었다. 거동이 어렵고 두 손 열 손가락을 거의 잃을 정도로 장애가 있어 주로 방안에서만 생활하는 한정식씨의 머리를 가위 손 심다영씨가 방문해서 이발하는데 자신이 처한 형편에도 심다영씨를 대할 때마다 늘 웃으며 맞고 기운이 나는 메시지를 전달해줘 오히려 용기를 얻게 된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는 그동안 한정환씨가 취미활동으로 모았던 수석을 나눠줬다며 재력이 많지 않아 돈을 주지는 못하지만 주변과 나눌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꼭꼭 숨기듯이 축적하지 않고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산다고 했다.
심다영씨와 한정식씨의 인연은 장애인복지관을 통해 2019년부터 미용봉사를 하면서다. 심다영씨는 대상자마다 사연이 있지만 한정식씨는 자신이 보기엔 어려운 처지인 것 같은데 두 분을 보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동기부여와 힘을 주는 분들이라고 소개했다.
‘항상 행복하세요 알았죠? 나의 미용천사님께’ 라고 한정식씨가 인두로 메시지를 새겨 심다영씨에게 준 선물은 심적으로 힘들어했던 심다영씨를 위로했다고 했다.
“볼품없고 쓰잘데기 없는 거다라고 했지만 이 삭막한 세상에서 우리 청년들에게 배워야 할 메시지가 분명히 있다”라고 당시의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어려운 것 같은데 이 긍정이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지난 10월 초 어느 날 한정식씨의 집을 찾았다. 빌딩 속에 사방이 꼭 박혀 바깥을 볼 수 없는 도시도 아닌데 관기리 한정식씨의 집은 겉보기에 윤택해 보이지 않았다. 구조적으로도 출입문을 통해야만 밖을 볼 수 있고 이 출입문을 열어야만 빛이 들어오는 곳이었다.
자신의 이름은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식당이름 한정식이라고 소개하며 부인 윤은순(66)씨와 함께 반갑게 맞아주었다.
기초지식은 심다영씨로부터 들은 바 있는데 취재를 하는 동안 내내 긍정적인 말을 하면서 웃음보를 터뜨리게 했다. 요즘으로 말하는 ‘아재개그성’을 보였다. ‘아재개그’는 웃음보다 썰렁함을 준다고 하지만 나름의 웃음코드가 있었다.
근본이 있어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관기초등학교와 보덕중학교를 다닌 학창시절에도 사회를 잘 보고 또래들을 웃겨서 행사가 있으면 앞에 잘 섰다고 했다. 학교 행사나 반 행사, 그리고 졸업 후에는 마을 행사 때도 불려가 주민들 앞에 섰었다고 했었다. 지금으로 보면 개그맨들이 행사에서 사회를 봐야 행사를 재미있게 이끄는 그런 재능이 있었던 것.
사람들을 잘 웃기고 말에 바퀴가 달린 것처럼 쉬지 않고 말을 잘 하니까 친구들이 본인의 동네에서 행사가 있으며 잘 불렀다고 했다. 그렇게 크고 작은 무대(?)에 서면서 간을 키우고, 말솜씨도 키우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더 많이 웃길 수 있을까 각본 없이 즉흥적으로 하는 연기실력도 늘렸다.
늘 맘속에서 자라고 있는 코미디언같이 방송국에서 일하고 싶은 소망을 진로로 정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20대 때 가족들 몰래 아버지 양복으로 차려입고 서울 KBS방송국에 올라가 무명 1씨로 보조출연을 한 적도 있다. 이후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집안에서 보조해줄 형편이 안 되자 한정식씨는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가 가진 재능은 입담이 못지않게 손재주에 능했다. 누구한테 배우지 않아도 눈썰미도 좋고 창작력도 뛰어나 그가 만들어낸 작품은 늘 출중했다. 그 실력은 속리산 상가에서 생계를 위해 시작한 불 그림에도 그대로 나타나 속리산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인데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마로면 관기리에서 속리산까지 말티고개를 넘어가는 그 먼 길을 매일같이 오가는데도 힘든 줄 몰랐다고 했다.
겨울 찬바람에 노출된 손은 특히 동상도 심했다. 또 뜨거운 인두를 오랫동안 잡고 꾸부려서 일하고 그래서 손도 다리고 허리도 허약해지고 다리도 쑤셨다. 그런 환경에서 오랫동안 일한 때문인지 나이가 들면서 몸에서 그대로 반응했다. 손가락은 하나 둘 마디가 절단해서 두 손 열손가락 중 성한 손가락이 없다. 두 다리는 펴지 못한 채 무릎이 발이 되었고, 두 손이 몸을 지탱해주는 지팡이가 되어 걸어야 했다. 무릎으로 걷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두 다리를 쭉 펴서 걷기보다 무릎으로 걷는 것이 편할 정도가 됐다. 내 무릎도 아닌데도 견디지 못할 통증이 느껴져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아픈 한정식씨를 대신해 부인 윤은순씨는 가정경제에 도움을 주기 위해 늘 공장을 다니며 일을 했다. 지금은 남의 집 노인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넉넉지 않은 가정경제를 꾸려가고 있다.
충남 청양에서 5남1녀의 장남에게 시집온 윤은순씨는 그런 형편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중풍에 치매까지 앓은 시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했다. 주변에서 그의 효심을 알고 효부상을 추천해 3차례나 상을 받은 훌륭한 어머니 상이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도 시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한 윤은순씨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동생들을 보살펴온 한정식씨 슬하에서 두 딸도 부모를 본보기로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자랐다.
부모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이 크고, 학원이나 과외 수강 등 조력 없이도 중고등학교 때 2, 3등을 할 정도로 공부도 잘했다. 그 정도면 대학 진학 욕심을 낼 만한데 일찍 취업전선에 나가 자립했다. 결혼해서 아들 둘씩을 두고 지금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 두 딸은 효행심이 남다르다.
아버지가 큰 수술을 했을 때 병원비를 두 딸이 감당했던 두 딸은 집수리도 감당하고 있다.
집수리는 밤낮없이 항상 불을 밝히고 지내야 할 정도로 어둡고 눅눅한 환경에서 거동이 불편해 집안에서 생활해야 하는 아버지가 혼자 있을 때라도 자기비관과 우울감을 갖지 않도록, 그리고 오랫동안 집안을 이끌어온 어머니를 위해 집안에서도 밖을 볼 수 있고, 빛이 들어오는 환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
한정식씨와 윤은순씨는 “두 딸은 공부하라고 다그치자 학원 한 번 보내지 못했는데도 공부를 잘했어. 형편이 되면 대학도 보내고 싶었죠. 하지만 형편이 안돼서 뒷바라지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두 딸이 우리에게 큰 선물을 해주는데 미안하고 또 고맙죠.” 라고 말했다.
집을 고쳐야 하기 때문에 짐을 정리해야 하는데 큰 짐이 있었다. 수석인데 젊었을 때부터 취미생활로 충주 남한강, 강원도, 거제도까지 가서 채집해왔을 정도로 그의 세월이 묻어있는 것이다. 돌을 보는 눈썰미도 남달라서 몸이 불편해 보행이 안 된 후에는 부인과 함께 다니며 “저기 저 돌” 가리키며 찍으면 부인이 가서 가져오는 식으로 해서 수 만점의 수석을 채집했었다. 그동안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도와준 사람에게 선물로 준 것도 상당한데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고 했다.
한정식씨는 집수리를 하면 수석실을 별도로 만들고 또 부인이 요양보호 일을 나가고 혼자 있을 때 했던 불 그림 작업도 그곳에서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틈틈이 한 불 그림은 보은군노인장애인복지관에서 주최한 전시행사에도 출품돼 손님들의 눈길을 모은 작품이다.
딸들이 해준 집수리 선물로 집안을 어떻게 꾸밀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밝은 기운을 얻고 있는 한정식씨와 윤은순씨. 그들이 맞을 새로운 생활이 어떨지 기대를 갖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