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면, 시인, 수필가,
충북작가회의 회원
집에 사람의 온기기 없으면 금방 낡은 집이 되고 만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그래서 이내 오래된 집, 고가가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속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지나가는 시골마을에는 빈집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속리산 주변의 시골만의 문제도 아니다. 시인이 살던 시대의 빈집과 지금의 빈집은 그 사연이 다르겠다.
망국의 한을 품고 고향을 떠나 북방으로 떠난 민초들이 살던 집이 비었다.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수도권 집중의 자본주의 고도화 시대에 직장과 생업을 찾아 도시로 떠나고, 남은 노인들마저 삶을 등지면서 빈집이 생긴다. 두 개의 사연은 어느 면에서 본질이 같지 않을까 싶다. 패랭이란 같은 제목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시편을 만나보자.
빗장은 굳이 닫히어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비인 집에는
묵은 기와장에 풀이 돋았다
옛날에는 골-터였다는 이집
깨어진 옥창(獄窓)에는 거미줄이 성기고
동헌(東軒) 뜰 앞에 서있는 늙은 소나무
올해도
비인 뜰에는 봄이 왔었다 한다
꽃비늘이 담 너머로 풍기어 왔었다 한다
길고긴 담장을 끼고 돌으면
묵은 기둥에서 풍기는 주토(朱土) 냄새와
댓돌 밑에 우는 귀뚤이
올해도 풍겨오리라 들려오리라 (1940년 작, 「패랭이 4 -고가(고가)」 전문)
대문이 닫혀있고, 방문이 잠겨있고, 지붕 기왓장에 풀이 나있고, 창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으니, 얼마나 오래 집이 비었을까? 주인은 언제 떠나, 지금은 어디서 살아가고 있을지. 그때나 지금이나 빈 집의 쇠락한 모습은 다를 바가 없겠다. 시인이 본 고가는, 한때 고을 관아가 있었던 자리였던 모양이다. 옥사로 쓰였던 건물의 창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보인다. 시인은 단순히 집을 떠난 이들이 고향을 등진 일에 그치지 않고, 고을을 다스리던 국가 권력의 침탈과 소멸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러면서도 동헌 앞의 늙은 소나무에도, 빈 뜰에도 봄이 왔다고 했다. 절망의 끝에서도 희망의 싹을 버리지 못하고 어디 한편에 심어두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봄꽃의 꽃잎이 날리며 향내를 풍기고, 황토 냄새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도 들려오리라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패랭이라는 장돌뱅이가 쓰는 모자를 제목으로 연작시를 쓰면서 시인이 말하고 싶었던 마음을 헤아려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식민지의 고통 속에서 결국은 살아남아서 다시 고향을 돌아오는 일이다. 제 살던 자리를 되찾는 희망이다. 장돌뱅이가 다시 찾아오는 일처럼 그 끈을 놓지 않는 일이 아닐까 싶다.
빛깔 고운 갈자리 풀로 만든 패랭이 모자와 하얀 목화송이, 그리고 나귀의 방울 소리는 그 희망의 상징이자 은유였겠다 싶다. 자칫 지루하였을 네 편의 패랭이 연작을 진득하게 읽어준 독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