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3군 문화예술거점사업 주민 자조모임…회남·회인면 탐방
영동의 자계예술촌이 추진하는 남부3군 문화예술거점사업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에 본사인 주간 보은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우리지역의 지정, 비지정 문화재와 생활문화유산을 탐방하는 우리동네 탐방 원정대가 운영되고 있다.
우리동네 탐방 원정대는 보은에 살면서도 군내 구석구석을 방문할 기회가 거의 없는 가운데 이번 사업을 통해 동네 구석구석의 문화유적을 탐방하면서 애향심을 키우고 문화재의 소중함과 조상의 지혜와 슬기를 배우는 기회가 되고 있다.
지난 7월 28일에는 회남면과 회인면, 즉 회인현의 구석구석을 탐방했다. 지역문화를 탐색하겠다고 나선 우리동네 탐방원정대원들은 폭염 속에서도 보은학의 기초가 될 지식쌓기에 열정을 보였다.
박연수 회원과 홍영의 회남면장이 탐방지를 설명한 가운데 회인면에서는 과거로 추억여행을 하는 흥미로운 시간이 됐다. 낡고 허름한 과거의 유적이 오히려 감성을 돋게 하면서 그 감흥이 오랫동안 남게 했다.
회인면은 매곡산성, 회인향교, 인산객사, 회인현감 내아와 회인양조장, 그리고 70년대 농촌 마을의 문화가 살아있는 눌곡마을 둘러봤다.
회남면은 군내 인구가 가장 적은 지역이다. 회인과 같은 회인현 속해 있어 회인 못지 않은 역사문화유적이 있었겠지만 대청댐 조성으로 대부분 수몰돼 안타까움이 크다.
남아있는 역사문화 유적은 수몰전의 지역의 자연이나 주민생활 및 활동상, 마을을 담은 사진이다. 소중한 기록자원이다. 수몰탑, 수몰 유래비 등이 설치돼 있으나 1, 2세대가 사라지면 수몰탑이나 유래비는 단순한 전시물에 불과할 것이다. 이제라도 소중한 기록을 수집, 지역의 역사 자원으로 꿰어놓아야 한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유물 수장고 회인
도시화가 된 보은과 달리 회인고을은 조선~근현대까지 아우르는 문화가 한 곳에 펼쳐진 귀한 곳이다. 시간여행을 하게 한다.
첫 방문지인 매곡산성은 삼국시대 때 회인면 부수리 아미산에 축성했다. 시간으로 치면 1천500여년의 역사가 살아있는 곳이다.
시내 즉 회인면 소재지인 중앙리 가까이에 있는 산성으로 중앙리에서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공주시의 공산성 느낌이 든다. 산성의 모양이나 성돌 등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시내와 가깝고 산림이 우거져 있고 또 석성이라는 게 맞아떨어진다. 탐방대원들은 고증을 거쳐 복원한다면 역사문화의 고장 회인의 멋이 배가됨으로써 외부인들을 더 많이 불러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유지인 산성은 잡초가 우거져 오르기 쉽지 않았다. 산성을 안내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회인면 중앙리 윤석영 군의원이 고맙게도 잡초작업을 함으로써 대원들이 산성을 오를 수 있게 도움을 줬다. 산성은 대부분 무너지고 성곽은 일부 구간에만 남아있었다. 성돌은 회인 용곡리와 남대문리에 걸쳐있는 호점산성의 성돌과 같은 점판암 성질의 돌이었다.
성에 오르느라 땀으로 옷이 흠뻑 젖은 대원들은 그나마 남아있는 성곽을 확인한 것에 만족했다.
매곡산성은 사실 나뭇잎이 모두 떨어졌을 때 회인면 중앙리 회인천변에서 아미산을 바라보면 전체적인 성의 윤곽을 볼 수 있다. 남쪽으로 성돌이 차곡차곡 쌓인 성벽이 보인다.
부수리의 회인향교까지 본 후 회인면 소재지인 중앙리로 들어와 인산객사를 찾았다. 객사는 각 고을의 관사로서 관리나 사신들의 숙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첫 축조시기는 알 수 없으나 효종 6년(1655년)과 순조 3년(1803)에 중수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국민학교와 면사무소로 사용했고, 해방 후에는 농촌지도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1983년 해체 보수했는데 당시 대들보 아래에서 ‘인산객사’라는 건물의 명칭과 효종 6년(1655년)과 순조 3년(1803)에 중수했다는 사실이 적힌 묵서명이 발견됐다. 그제야 인산객사라는 이름을 찾은 것이다.
그나마라도 복원된 것은 다행이나 인산객사 앞 광장을 제외한 객사 주변이 민간에 불하돼 사유지로 사용되는 우는 막지 못했다. 그래서 객사 경관을 조성하는데 한계가 있다. 객사 입구에 민가들이 들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솟을대문 주변도 사유지여서 일제강점기 때 파괴됐던 솟을대문은 대문만 재현하고 좌우에 담장을 쌓지 못했다. 또 다른 시설이 없어서 짓다가 만 것 같은 모습이어서 안타까움을 준다.
일제강점기 때 인산객사가 많이 훼손했고 문화재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던 시절 귀중한 문화재들이 많이 훼철되고 망가진 것을 생각하면 역사문화재에 대한 인식을 바로 가져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회인은 근현대를 담을 수 있는 영화촬영장
편의 편리를 추구하면서 옛것을 버리고, 낡은 것을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을 앞다퉈 시행한다. 그리고 그것을 발전으로 받아들인다. 요즘은 복고, 전통을 미학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변화가 있긴 하지만 흔적도 없이 밀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소중한 근대 문화유산들이 많이 사라졌다. 그런 양상 속에서 박세식(66)씨가 소유하고 있는 회인양조장은 얼마나 다행인지 운영하지 않는데도 부수지 않고 옛 모습을 거의 보존, 근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살아있다.
오래된 목간판, 황토색 페인트를 칠한 나무유리창, 흰색 회벽, 서까래와 대들보, 양철지붕, 건물의 외양만으로도 단박에 오랜 시간이 읽힌다.
내부도 탁주 저장탱크와 탁주 가격표, 제성(술을 거르는 곳), 저장실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또 균을 배양시키는 입국실, 우물, 펌프, 술을 발효시켰던 사입실, 발효균이 농축된 술을 만드는 주모실 등도 그대로 있다.
막걸리를 발효시켰던 큰 독도 그대로 있고 큰 자전거에 매달아 배달했던 말 술통도 있다. 사무실 겸 숙직실이 있고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사무실의 철제 책상과 나무 서랍, 그리고 박세식씨의 아버지 때부터 사용했던 100여년 된 묵직한 철제 금고와 캐비닛 등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전시물품도 남아있다.
이렇게 옛날 양조장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덕분에 회인여행에서 양조장은 꼭 가보고 싶은 관광지이다. 그래서 관광객 뿐만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촬영 섭외도 온다.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도 촬영해 나왔다. 2016년엔 류승완 감독 황정민 배우의 영화 ‘군함도’ 촬영 제의도 받았으나 당시는 영업을 할 때여서 거절했다고 했다. 만약 촬영을 허가했다면 회인양조장은 650만 관객이 든 영화 촬영지로 소문이 나면서 전국적인 관광지로 명성을 날렸을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회인문화재 야행 때는 회인양조장에서 대추막걸리를 빚는 체험이 진행되는 등 단순한 현장 재현에 그치지 않고 전통식문화 체험의 기회도 제공하며 관광객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회인양조장 바로 뒤에는 회인현감이 생활하던 지방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는 내아(內衙)가 있다. 내아는 일제강점기 시절 개인에게 불하했는데 조씨 성을 쓰는 사람이 불하받은 후 50여년 전 강원도 출신인 이종희(100세)씨가 매입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종희씨는 현재가 내아가 아닌 별채를 건립해 생활하고 있다.
문화재팀장을 지냈던 홍영의 회남면장은 회인양조장 뒤쪽에 회인현감의 살림집이었던 내아가 있는 것으로 봐서 양조장과 양조장 앞쪽에 있는 회인 중앙교회 그 어디쯤 회인동헌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추정했다.
보은동헌이 보존되고 있는 것과 달리 회인동헌은 아예 없다. 보은은 내아가 없고 회인은 내아는 있다. 동시대의 것일테니 구조나 규모 등이 거의 같지 않을까 싶다. 우리지역에서 두 개를 모두 탐색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회인양조장 입구에 있는 회인중앙교회는 1915년 예배를 시작, 아주 오래된 교회다. 청주와 경계인 피반령이라는 험한 고개가 둘러쳐져 있는 산골인데 기독교회가 빨리 뿌리내렸다. 우리지역에서 100년 넘은 역사의 교회는 보은교회를 비롯해 거현교회, 원평교회 등 몇 되지 않는데 회인은 교회도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회인중앙교회, 회인양조장, 내아를 둘러보고 돌담길을 보면서 발길을 옮기던 중 회인초등학교 옆 적산가옥 느낌의 가옥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정무영씨가 경기도에서 살다가 12년 전 고향으로 들어와 4대째 이어오는 종가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우물채, 헛간채로 구성돼 있는데 집주인은 적산가옥이 아니라고 말했다.
주택을 보수하던 중 대들보에서 대정10년인 1921년에 지었다는 문서가 나온 103년 세월의 가옥은 정무영씨의 증조부가 지은 것으로 전통 한옥방식에 일본식을 가미한 신식 집이다.
정무영씨는 “원래 지붕은 양철이었는데 집을 고치면서 양철을 걷어내고 방수포를 깔고 너와지붕처럼 사각으로 반듯반듯하게 자른 나무를 얹었다”고 말하고 “마루는 전통한옥처럼 대청마루였고 누마루도 있었으나 어머니 건강때문에 유리문을 새로 달았다”고 덧붙였다.
또 “사랑채도 안채처럼 혼합식으로 보이지만 사랑채는 구한말 회인현이었던 청원군 가덕면에서 전통한옥을 그대로 옮겨와 지은 것이고 지붕은 돌기와였던 것을 안채 수리할 때 나무판자로 바꿨다”고 말했다.
누가 봐도 이색가옥인 정무영씨 가옥은 회인여행객들의 방문을 받는다. 탐방대원들은 “회인면을 구석구석 탐방하는 기회가 아니었다면 아마 정무영씨의 가옥은 보지 못했을 것이라며 건축문화의 색다른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회인면 중앙리는 1906년 설립돼 올해 개교 114주년인 군내에서 가장 오래된 회인초등학교가 있다. 또 회인초등학교를 3학년까지 다녔고 일제강점기 친일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인 오장환 시인의 생가가 복원돼 있고 그의 문학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오장환 문학관도 있다. 골목골목에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의 유적들이 자리해 볼거리가 풍부한 중앙리는 작은 면소재지 마을이지만 고샅을 샅샅이 누비며 하루 종일 탐방해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볼거리가 많다. 영해박씨 집성촌인 눌곡리를 찾았다.
#오래된 마을 눌곡은 지붕없는 전시관
영해박씨 집성촌인 눌곡리는 인근의 중앙리처럼 조선시대 관청이 있는 마을은 아니지만 70, 80년대 농촌 마을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매우 정겹다.
마을의 랜드마크라 해도 손색이 없는 문닫은 정미소가 길목을 지키고 있는 눌곡리에는 들기름 먹인 가마솥을 걸어놓은 아궁이, 그리고 소 외양간, 돌담, 두레박까지 매달아 놓은 공동우물, 대문만 있는 게 아니라 문간채에 큰 나무대문을 설치했을 정도의 가옥구조를 띠고 있다. 마을만들기 사업으로 벽화를 그리고, 돌담을 쌓는 등 마을 정비를 했는데 이질적이지 않고 70년대, 80년대의 정겨움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런 회인면 눌곡리의 풍경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눌곡리를 찾는 여행객들도 증가하고 있다, 캠핑장이나 유명한 관광지, 유원지가 아닌데도 농촌감성을 즐기는 여행객들의 증가는 마을 여행을 하나의 관광컨텐츠로 제작하는 방안 마련이 필요해 보였다,
사진기를 둘러맨 여행객들은 사람없는 구불구불 골목길, 녹슨 양철지붕, 칠이 벗겨진 대문, 허물어질 것 같지만 균형을 이루고 있는, 낮은 돌담, 파란 페이트를 덧칠한 대문, 세월 때가 묻은 우편물함, 개구쟁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의 벽화 등 과거의 모습을 2024년 현재에 확인하고 연신 카메라에 담고 있다.
100년의 마을은 100년의 역사를, 600년의 마을은 6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집집마다 애틋한 기억이 담겨 있고 골목마다 세월의 때가 묻은 이야기를 갖고 있다. 마을의 풍경이 문화의 원형이 된 회인면 중앙리와 눌곡리 등 오래된 마을은 지붕없는 박물관이란 생각이 들었다.
#1980년 대청호 조성으로 6개 마을 수몰된 회남면
회남면은 조선시대 회인현, 구한말 회인군의 남면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군면폐합을 했는데 당시 남면이 회남면으로 명명됐다. 회남면내 마을은 신추(新秋), 금곡, 조곡, 판장, 용호, 분저, 사담, 송포, 사탄, 서탄(書灘), 은운(隱雲), 노성, 사음, 매산, 산수, 거교, 염티, 어성, 남대문 신곡(新谷), 법수리까지 20개리로 개편했다. 그러다 1987년 노성리는 수한면에, 염티리는 청원군에 편입되면서 18개 마을을 관장한다.
처음 회남면으로 명명됐을 때 면소재지는 조곡리였다. 그러다 자연마을 명으로 영당이라고 불렸던 신곡리로 면사무소를 이전하면서 한동안 면소재지는 신곡리였다. 1980년 대청댐 건설되면서 면 소재재였던 신곡리 영당마을은 수몰됐고 사당마루 날망에 새로 이주마을(거교2리)이 조성되고 이곳에 면사무소와 회남초등학교, 농협, 우체국이 건립됐다.
대청댐 조성으로 회남면의 많은 마을이 수몰됐다. 용호, 서탄, 사탄, 산수, 매산, 어성, 송포리에서 경지면적 381.1㏊ 임야 1천249㏊, 기타 150㏊가 완전히 수몰됐다. 이주민은 216가구에 1천311명이나 발생했다. 이외에 신곡, 판장, 조곡, 거교, 금곡, 신추, 은운, 분저, 법수, 남대문, 사음리 지역도 일부가 수몰, 이주민 305가구 2천900명이 발생했다.
사탄, 매산, 송포, 어성, 용호리는 수몰되면서 법적 마을 이름은 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됐다. 수몰지 중 가장 늦게까지 사람이 살았던 곳은 서탄리다. 신곡리 류중은 이장이 1996년 서탄리에서 신곡리로 이주하면서 서탄리도 무인지가 됐다.
이같은 수몰기록은 2007년 남대문공원 내 세운 수몰탑 및 수몰유래비에 남겼다. 수몰탑에는 동덕여대 교수 출신 김사인 시인의 ‘아이들 자라 고향을 묻거든’이란 작품이 새겨져 있다.
후대에게는 고향이 수몰된 선대의 아픔을 전하고 수몰지 고향의 추억을 갖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아쉬움을 달래며 애향심을 갖게 한 것.
아이들이 자라 고향을 묻거든 이곳에 와 소리쳐 부르게 하라 / 가난했으나 / 지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답던 곳 / 솔개를, 서당평을, 사자울을 부르게 하라 / 산수골을, 어성을, 양중지를, 살목을, 바탕뫼를, 영당을, 새별을, 사당마루를, 정문거리를 소리쳐 부르게 하라
눈물을 닦고 / 별 총총하던 그 여름밤을 말해주라 / 키 큰 미루나무의 신작로길을, 가재와 다슬기의 시내를 / 순한 소들과 깔베던 어린 지게들을 / 동네마다 불을 켜던 가을 감나무들과 아늑한 저녁연기들을 / 캄캄한 고갯길을, 벚꽃 만발하던 모교의 교정을 말해주라
겨울 강 쩡쩡 얼음 터지는 소리에 잠을 설치며 / 딴딴한 장딴지의 젊은 아버지와 / 가르마 슬기롭던 젊은 어머니 함께 우리는 여기서 살았노라고
훗날 누가 고향을 묻거든 / 그대 눈물을 닦고 / 내고향, 그 빛이 너무도 고와 / 그 빛 너무 눈부셔 / 시샘한 수궁이 데려갔노라 일러주라 / 무심한 저 물 앞에 서서 그리운 이름들 소리쳐 부르라 / 부르게 하라
어쩔 수 없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에서 이사보따리를 싸서 빠져나왔지만 추억은 그대로 둔 회남 수몰민들의 심경이 절절하게 담겨 있다.
#물길로 회남주민의 발 버스도 배에 실려 운행되기도
회남면은 대청호가 조성되기 전에도 도랑, 하천의 물줄기가 지역을 휘돌아갔다. 배를 타야 건너야 하는 강줄기가 혈액처럼 흘렀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대전과 가까운 어부동(사음리)~사탄리(수몰마을) 구간은 큰 강줄기가 굽이굽이 흘러 배로 건너야 했다. 뱃길이 곧 지방도였다.
회남면은 지금도 대전시가 생활권이지만 1980년 이전에도 대전시에서 시외버스가 들어오는 지역이었다. 대전을 출발해 회남면으로 향하는 버스는 어부동(사음리)부터는 버스 운행을 하지 못했다. 어부동 선착장에서 버스도 나룻배를 실려 현재는 완전 수몰돼 산만 남은 사탄리까지 옮겼다.
나룻배가 버스를 싣고 강물을 건너가는 모습은 거교2리 날망에 벽화로 남았었고 회남면민들이; 추억을 공유하는 커뮤니티에도 사진이 게재되는 등 당시의 현장이 생생하게 전달해줬다. 고향마을이 수몰된 회남면 출신 주민들은 앨범에 꽂혀있는 사진을 보며 종종 추억을 소환했다. 큰 물줄기가 없고 물을 건너기에 문제가 없는 육지의 주민들은 상상이 안되는 장면이어서 흥미롭게 다가온다.
댐 조성 후에는 물길에 다리를 놓으면서 모두 육로로 통과할 수 있게 됐으나 나룻배운행은 한동안 계속됐다.
나룻배운행이 중지된 것은 마을별로 운행되는 봉고차가 지원되면서부터다. 볼일이 있는 주민들을 봉고차로 회남면사무소가 있는 거교리까지 이송했고 이곳에서 각 목적지까지 가는 노선버스를 이용했기 때문에 더이상 나룻배를 운행할 필요가 없었던 것.
다만 분저리~신곡리 구간은 한동안 나룻배 운행이 계속됐다.
신곡리 쪽은 신곡리 송림가든 가기 전 버스 승강장에서 대청호에 접해있는 곳이 선착장이 됐었다. 이곳에 닿는 배를 타고 분저리 선착장까지 이동했다. 그러다 90년대 중반경 육로를 운행하는 대중교통 수단이 정상화되면서 도선 운행도 종료됐다.
그러나 주민들은 서탄리와 사탄리 송포리는 뱃길 아니면 닿을 수 없어서 명절 때마다 성묘에 어려움을 겪는다. 유중은 이장은 “분저~신곡간 운행했던 도선은 성묘 등 목적이 뚜렷한 뱃길을 운행해 서탄, 사탄, 송포리에 묘소가 있는 실향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는 바람을 밝혔다.
회남면 구역이지만 도로포장이 안돼 수한 노성리를 거쳐 회남면으로 와야했던 은운리를 임도를 따라 찾아가 보는 등 이날 회인, 회남면내 구석구석을 탐방했다.
“우리동네탐방원정대 참여 아니고는 우리가 언제 이렇게 지역을 속속들이 탐방하고 지역의 역사를 공부하고 주민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느냐”며 “참여하길 잘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