칡, 너는 죽었다
칡, 너는 죽었다
  • 보은사람들
  • 승인 2024.05.09 10:22
  • 호수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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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심 웅 섭
회인 해바라기TV 운영자

올봄, 때아닌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자연과 어울려 평화롭게 살겠다며 마을 끝자락으로 들어온 내가 어쩌다가 무시무시한 전쟁을 시작했을까? 대부분의 싸움이 그렇듯이 처음 발단은 엉뚱한 데서 시작되었다. 작년 여름 집중호우에 집 뒤, 산이 조금 무너져 내렸다. 규모가 작긴 하지만 산사태가 난 것이다. 그 피해는 처참했다. 밀려 내려온 흙과 나뭇가지가 배수로 입구를 막았고, 물이 넘쳐 새로운 길을 만들면서 마당과 장독대를 덮쳐버렸다. 이걸 수습하느라고 뜨거운 여름, 며칠 동안 그야말로 죽을 똥을 쌌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새롭게 안 사실이 있다. 사태가 난 경사면에 나무와 풀이 별로 없다는 거다. 무언가 잔뜩 푸르게 덮고 있던 건 다름 아닌 칡이었고, 무성한 칡 덤불 밑에는 풀은 물론이고 작은 관목들도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순간 머리에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칡이 산사태의 원인이 아닐까? 물론 칡도 뿌리가 있고 무성한 덩굴이 땅을 덮지만, 작은 풀과 나무가 어우러져 있을 때와는 피복력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할 것 아닌가 말이다. 
검색을 해 보았다. 생각과는 달리 칡이 산사태를 일으킨다는 연구결과는 없다. 그러나 칡에 대한 다른 부정적인 정보들이 눈에 띈다. 칡은 성장 속도가 엄청나다. 한 해에 무려 18m까지 자란단다. 문제는 나무든 덤불이든, 하다못해 전봇대까지 서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휘감아 뒤덮어 버리는 거다. 넓은 잎으로 해를 가려 풀과 나무는 서서히 죽게 되고, 전봇대에 기어오른 녀석은 자칫 누전을 일으키기도 한단다. 
물론 칡에도 좋은 점이 많다. 무엇보다 나와는 어릴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다. 군것질거리가 귀하던 시절, 형들이 캔 암칡을 한 토막 얻으면 하루가 행복했다. 송곳니로 한 입 떼어물고 질겅질겅 씹으면 달콤한 물과 함께 작은 전분 덩어리가 입에 가득했다. 게다가 칡국수와 칡차는 속을 편하게 하고 칡꽃의 달달한 향기 또한 매혹적이다. 마음이 약해진다. 그러나 옛정에 이끌려서는 안 된다. 칡은 산사태의 잠재적 범인이며 나무를 감아 목 졸라 죽이는 흉악범이다. 마음을 다잡고 전략을 세우기로 했다.
산림청에서 만든 영상을 보니 칡의 뇌두를 찾아서 제거하면 된단다. 알뿌리에는 생장점이 없으니 굳이 캐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옳다구나, 작은 괭이와 톱을 들고 따스한 봄 햇살 속에 칡 사냥을 나섰다. 아직 풀이 자라기 전이니 덩굴을 따라 뿌리를 찾는 일이 어렵지 않다. 괭이로 뇌두가 드러나도록 살금살금 파헤치고는 톱으로 살살 썰어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몇 개 정도만 제거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제법 많다는 거다. 경사지에 몸을 붙이고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작업하기도 만만치 않다. 이틀의 지상전 끝에 어쩔 수 없이 화학전으로 전환했다. 드릴로 칡에 구멍을 내고 여기에 제초제를 몇 방울 떨어뜨렸다. 너무 한 것 아닌가,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산사태와 목졸려 죽은 나무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1차전이 끝났다.
그 사이, 꽃이 피었다가 지고 숲이 무성해졌다. 적들의 동향이 궁금해서 다시 현장을 찾았다. 대부분 죽었지만, 간혹 순을 내밀고 있는 작은 줄기들이 보인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작다고 무시했던 잔당들이다. 이건 전면전 대신 가벼운 소탕작전이 제격이다. 맨손으로 여린 줄기들을 당기니 아주 쉽게 떨어진다. 생각해보니 그 새 두 달이 지났다. 칡과의 전쟁을 벌이면서 봄을 보낸 것이다. 문득 질문해 본다. 내가 칡을 이겼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은 남아있는 칡이 어디선가 비집고 나와서 숲을 이루리라. 그러나 짧게 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칡의 무자비한 생태가 내 눈에 딱 걸렸고 나는 시간이 아주 많다. 게다가 알고 보니 이런 종류의 전쟁을 은근히 즐기는 편이다. 자칫 무료해지기 쉬운 시골 일상에 전쟁보다 짜릿한 사건이 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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