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월
  • 보은사람들
  • 승인 2023.11.23 09:27
  • 호수 7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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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김 철 순
시인
마로면 관기약국

오래지지 않는 꽃이 있었다
오래 마음 비우지 못하는 그릇이 있었다
꽃은 오랫동안
사람의 마음을 붙들어 놓을 수 없었고
비우지 못한 그릇엔 이끼가 끼고 흐려져서
누구의 마른 목도 적셔 줄 수가 없었다

잎을 떨구지 못하고 늙어가는 나무를 보며
묵은 잎 떨구지 못해 누추해진 나를,
툭 툭 털어본다

                - 「11월의 나무를 보며」 전문 -

오래 전에 쓴 나의 졸시다. 11월, 도대체 올 것 같지 않던 가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겨울이 갑자기 들이 닥쳤다. 해마다 11월초에 김장을 하곤 했는데, 일이 생겨 두 번째 주로 미뤘더니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그래도 어쩌랴, 받아놓은 날이니.
80포기 정도의 배추를 뽑아 절임을 해달라고 미리 부탁해놓은 사람에게 갖다 주었다. 작년부터 절임을 부탁하는데, 작년에도 추웠는데 올해도 추워서 얼마나 미안하던지. 직장을 나가느라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만 나 편하자고 누군가에게 나의 일을 부탁하는 것처럼 느껴져 자꾸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11월초부터 저녁마다 조금씩 마늘을 까놓고 생강도 다듬어 놓고 했지만, 무랑 쪽파랑 파, 갓 등은 미리 해놓을 수 없으니 김장 전날 다듬고 씻고 하는데 그것마저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준비하는 과정은 온전히 내 몫이라 퇴근하면 캄캄한 밤이고 시간에 쫓기며 한다. 김장 날은 휴일이라 아들 딸 며느리까지 모여서 같이 버무리니 오히려 덜 힘든 거 같다.
아무튼 11월에 해야 하는 일 중에 제일 힘든 김장을 끝냈다. 아이들 나누워 주고 몇 군데 택배도 부치고 나니 올해 할 일은 다 끝낸 거 같은 홀가분한 마음이다.
바쁘다, 바쁘다, 하면서 베고니아 화분을 미처 들여놓지 못했더니 꽃을 피우다 말고 시들어 버렸다. 얼마나 미안한 생각이 드는지 말을 못하는 꽃에게, 듣지 못하는 꽃에게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어루만지며 말을 했다. 임시방편으로 비닐로 덮어놓았으나 결국 죽고 말았다. 무심한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고개를 들어 11월의 나무를 보니 날이 따듯해 미리 겨울을 준비하지 못한 퍼런 잎들이 추워서 오들오들 떨고 있다.  채 단풍이 들기도 전에 겨울이 온 것이다. 저 나무도 좋은 날에, 풍요로운 날에, 미리 추운 겨울을 준비 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사람도 그러하리라.  풍요로움이 계속될 줄 알고, 따듯한 날만 계속될 줄 알고 미리 추운 겨울을 생각 못할 수도 있으리라. 서서히 겨울이 왔다면, 서서히 추위가 왔다면, 단풍이 들고 미리미리 겨울을 준비했으리라. 나도 미처 가을 옷을 꺼내기도 전에 겨울이 와 버렸다. 사람도 그러한데 달력도 없는 나무들은, 풀들은 맨몸으로 된서리를 맞았을 것이다.
11월, 입동도 지나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겨울 초입이다. 나에게도 잎을 떨구지 못하는 생각은 없는지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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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선 2023-11-23 13:02:52
졸시가 아니라 멋진 11월의 시네요
말못하는 꽃들에게 미안해하는 시인의 마음이 너무 예쁘세요.또다름의 만남이 있을꺼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