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외 중티리가 집, 농협군지부 앞에서 작은 수선 가게 운영
장애는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이들이 있는 반면, 후천적으로 어떠한 사건을 겪으며 가지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반 사람들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흔히 홀로 살아가기 힘든 사람이라는 생각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바라보곤 한다. 하지만 과연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홀로서기가 힘들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예기치 못한 사고를 겪고한쪽 다리를 잃었지만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상태보자 가족들의 생계를 염려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이전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지 40년째인 구두수선원, 김윤광(75)씨를 만나보았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었지만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산외면 중티리에 거주하고 있는 김윤광씨는 40여년 전, 군대를 전역하고 울산에서 직장을 다니던 어느날 일을 마치고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중, 뺑소니 차량으로 인해 큰 사고를 당했다. 당시 사고를 당한 사람은 네 명. 그 중 김윤광씨와 옆에 있던 여성분이 가장 심하게 다쳤다고 한다. 병원으로 이송된 김윤광씨는 5일만에 눈을 떴고, 눈을 떴을 때는 왼쪽 다리의 뼈가 으스러져 쓸 수 없게 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결국 다리를 절단 하는 수술을 해 한쪽 다리를 잃었다고.
김윤광씨는 당시의 사고를 회상하며 "다리 뼈는 다 으스러졌는데 발가락은 움직이고 그랬거든. 요즘 같으면 인공관절이라도 있으니 인공관절을 심었겠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일절 없으니 그냥 잘라냈지 뭐. 사고도 뺑소니 사고를 당한거라 수술비도 전부 자부담으로 했지 뭐"라며 덤덤하게 얘기했다. 사고를 당하고 약 1년을 그저 놀았다는 김윤광씨. 1년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씩 집 밖으로도 외출도 가능해졌다고 한다.
슬하에 2남 2녀, 4남매의 자녀를 둔 김윤광씨였지만 다행히도 장애인의 생활 및 생계를 지원해주는 제도 덕에 자녀들이 학교를 다니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김윤광씨의 막내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되던 해에 일어난 일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원마저 큰아이가 19살이 되자 나오지 않게 되었다. 결국 자녀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만 하는 상황이 오게 된 것. 김윤광씨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밖으로 나섰다.
#구두수선을 시작한 김윤광씨
어느 날 시내를 돌아다니던 중 신발 수선을 맡길 일이 생겨 구두 및 신발을 닦고 수선해주는 구두수선원에게 신발을 맡기러 가게 된 김윤광씨. 신발을 맡기며 구두수선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저렇게 앉아서 하는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고 한다. 그 길로 그 구두수선원에게 구두 수선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며 매일 찾아가 술도 사고, 밥도 사면서 매달렸다는 김윤광씨는 결국 어깨너머로 구두와 신발을 수선하는 기술들을 하나 둘씩 배워가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울산에서 자신만의 구두수선집을 차린 것이 40년 전 일이다. 지금이야 기성화가 많이 나오고 브랜드 신발도 많이 나와 구두수선을 맡길 필요가 없어졌다고는 하나, 당시에는 구두와 신발을 수선하기 위해 줄을 서야할 정도였다니 아이들의 학비와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울산에서 구두수선을 하며 생활비를 번 것이 20년. 불편한 점이 있다면 당시에는 차가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했는데, 목발을 짚고 다니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 힘들었다고 김윤광씨는 회고했다.
#다시 고향인 보은으로
울산에서 구두 수선을 한지 20년. 자녀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구두수선이, 아이들이 자라 독립하고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나니 어느덧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자녀들이 자란 만큼 같이 나이가 든 김윤광씨는 대중교통으로 출퇴근 하기에도 힘에 부치기 시작했고, 고향 가족들의 우려와 걱정으로 울산에서의 구두수선일을 정리하고 고향인 산외면 중티리로 돌아왔다.
가족들의 우려섞인 성화에 돌아온 보은이지만 마냥 쉬고 있기에는 몸이 근질거렸다고한다.
집을 나와 청주를 오가며 차표를 팔거나 복권을 파는 일도 해봤지만, 거동이 불편했던 김윤광씨에게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제대로된 시설을 갖추진 못해도 현 읍사무소 앞 골목에 자리를 잡고 다시 구두 수선 일을 시작한 김윤광씨.
허술한 천막으로된 시설 때문에 비가 오거나 눈이 오기라도 하면 신발 수선이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날씨가 좋지 않을 때를 제외하곤 매일 읍내로 출근해 사람들의 구두를 닦고 신발을 수선했다. 그러던 중 읍사무소 앞 골목을 넓히는 공사를 하는 탓에 자리에서 쫓기듯 나와 현 보은농협 옆에 자리를 잡게된 김윤광씨. 불행중 다행으로 자리를 옮기며 작은 컨테이너 박스를 얻어 구두 수선을 하기 시작했다. 나중 일이지만 영역을 넓혀 주 5일중 격일로 보은읍내와 증평을 오가며 구두수선 일을 했다.
#찾는이가 줄었어도 행복하다.
울산에서 20년, 보은에서 20년, 총 40년의 세월을 사람들의 구두를 수선하며 살아온 김윤광씨. 처음 구두수선을 하던 때와 달리 수선집을 찾아 신발을 맡기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구두수선으로 돈을 벌기는 어려워졌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작년 초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지금까지 수선집을 찾는 고객들이 반 이상은 줄었다. 결국 증평에서의 수선집을 정리하고 온전히 보은읍으로만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고, 찾는 이가 거의 없다 보니 이제는 그저 사람 구경하는 맛에 나온다는 김윤광씨.
자가용 차를 타고 오전 8시 반까지 출근해서 자리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며, 컨테이너 안이 답답하다고 느껴지면 목발을 짚고 한 번씩 나와 사람 구경도 하고, 햇빛도 쬐고, 바람을 쐬기도 하다가 손님이 찾아오면 자리로 돌아와 다시 본업에 충실한다. 그렇게 하루일을 마치고 나면 매출 3만원이 나올까 말까다. 그럼에도 김윤광씨의 얼굴에는 여유와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생활비를 벌기위해 시작한 구두수선은 이제 김윤광씨에게 없으면 허전한 하루의 일과가 되어버린 것.
코로나19가 막 터지고 3개월 정도 집에서 마냥 휴식을 취하기도 해봤지만, 그 3개월이 너무 갑갑하고 힘들었다고 한다. 경로당에서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자식, 손자 얼굴도 보지 못하다 보니 갑갑함은 2배가 되었다. 다행히도 시간이 흘러 다시 구두 수선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하루도 빠짐없이 보은읍으로 출근을 한다.
40년 전 예기치 못한 사고로 다리 한쪽을 잃고도 자신보다 자녀들의 학비와 가족의 생계를 우선으로 걱정한 김윤광씨. 뺑소니 범을 증오하며 평생을 절망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닌, 앞으로의 삶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구두 수선을 시작한 김윤광씨를 일반인의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이 아닌 일반인도 보고 배워야할 인생의 멘토로서 바라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