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속리산의 화려했던 명성, 그땐 그랬다
①속리산의 화려했던 명성, 그땐 그랬다
  • 송진선 기자
  • 승인 2017.09.06 20:43
  • 호수 4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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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단순했던 90년대까지 속리산은 관광르네상스였다
▲ 옛날 속리산 관광지의 모습이다. 변변한 관광지가 없었던 6, 70년대속리산은, 법주사는 국민 관광지였다. (부러진 가지가 없는 원형의 정이품송)

 충북을 대표하는 관광지 속리산은 9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었다.

대형버스 터미널에서 하차한 후 법주사나 문장대를 등반하기 위한 관광객들의 행렬이 넓은 도로를 가득 메워 산을 보는 것인지 사람을 보는 것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하지만 잊혀버린 관광지가 된 속리산의 위상도 급격히 추락했다. 우리나라 국립공원 지정 순위를 보면 1호 지리산(1967년), 2호 경주(1968년), 3호 계룡산(1968년), 4호 한려해상(1968년)이고 6호인 속리산은 5호인 설악산과 같은 해인 1970년 3월 24일 지정됐다. 현재 22곳의 국립공원 중 속리산의 역사성이 무색하리만치 쇠퇴해 버렸다. 급기야 올해는 문화관광부가 2년마다 선정하는 한국이 꼭 가봐야할 한국 관광 100선에서도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충북에서는 속리산과 단양팔경, 괴산 산막이 옛길이 선정됐었으나 올해는 대통령 별장이었던 청남대가 선정됐고, 단양팔경은 연속 3회, 괴산 산막이 옛길은 2회 연속 선정됐다.

관광트렌드 및 관광객들의 수요를 맞추지 못하고 있는 속리산의 실상으로 보면 탈락되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그리고 현재 보은군의 관광정책으로 보면 속리산은 한국인이 꼭 가봐야할 관광 100선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는데도 난망(難忘)하는 분위기이다.

속리산은 보은군의 대표먹거리, 지속가능한 미래식량이다. 불과 2, 30년 전만 해도 잘나갔던 속리산의 모습과 2, 30년을 지나오는 동안 추락한 관광지로 변한 속리산, 살리지 못한 숨은 매력을 재 발굴, 관광보은의 위상을 찾을 수 있도록 선진 사례 등을 통해 해답을 찾아본다.

글싣는 순서

▶속리산의 화려했던 명성, 그땐 그랬다

▷속리산의 화려했던 명성, 그러나 지금은

▷지역 관광상품과 타 지역 관광상품 비교 보도

  사라진 속리산 황톳길: 100선에 선정된 계족산 황톳길

  형식에 그치는 속리산 산신제: 유네스코 무형유산인 강릉단오제

  없어진 속리산 법주사 탑돌이 : 무형문화재된 월정사 탑돌이

  없어진 속리산 세조 어가행렬 : 수원 정조대왕 능행차 재연

  단발성 속리산송이놀이 : 상설공연 안동 하회 별신굿

  판 못키우는 송이놀이 : 5일장 상설공연 정선 판 아리랑

▷관광선진지 단양군 탐방

▷속리산 명성 부활대책Ⅰ

▷속리산 명성 부활대책

 

속리산은 변치 않는 스테디셀러

문학이나 음악에 고전이 있는 것처럼 여행지에도 고전이 있다. 법주사로 대표되는 속리산도 고전에 속한다. 고전이라는 용어자체가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스테디셀러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고전은 오랫동안 꾸준히 일정한 수량 이상으로 팔리고 있는 책이나 상품을 뜻하는데, 속리산도 예전같지는 않지만 특별한 이벤트나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뭔가를 터뜨리는 수를 부리지 않아도 옛날부터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승지이다.

옛날 속리산 법주사를 다녀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속리산은 학생들의 수학여행지, 신혼여행지, 불자들의 사찰 순례지였다.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추억을 쌓았던 속리산은 유명세를 떨쳐 보은군은 몰라도 속리산은 알 정도였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외지인들에게 "보은에서 왔어요" 하면 금방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은을 더듬다가도 "속리산이 있다"고 하면 금방 알아차린다. 보은이 존재감이 없기도 하지만 속리산의 존재감이 그만큼 크고 과거 관광 100선이 있다면 선두를 점할 정도로 거의 모든 국민들이 찾은 국민관광지이기 때문이다.

이는 속리산을 연간 찾은 방문객 수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에 의하면 속리산 탐방객 숫자를 기록한 것이 1992년부터였는데, 당시 속리산을 찾은 인파가 210만명에 달했다고 밝혔다.

대전엑스포 때 속리산 숙박시설 동나

변변한 관광지가 없었던 6, 70년대를 지나 1980년대와 90년대 속리산의 영화(榮華)는 청동대불 조성과 대전 엑스포가 가져왔다.

1986년 시멘트로 돼 있던 미륵불이 청동 대불로 다시 태어난 것은 속리산의 영화를 다시 한 번 재현하는 도화선이 됐다.

1964년경 조성된 콘크리트 불상의 노후화로 붕괴위험이 따르자 이를 해체하고 1990년 동양 최대의 청동미륵불을 조성한 것이 당시 전국적으로 최대의 관광상품이 되기에 충분했다. 전국에서 동양최대의 청동미륵대불을 보기 위해 연일 인파가 몰려들었다.

동양 최대라는 타이틀은 이후 오랫동안 계속됐고 속리산은 동양 최대의 미륵불로 인해 최고의 관광특수를 누렸다.

미륵불상은 원래 금불상이었다. 신라 혜공왕 12년(서기776년)에 진표율사가 7년간의 노력 끝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해 모셨던 것.  이 후 조선조 고종 9년(서기1872)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축조하며 '소요되는 자금'인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해 갔다. 한동안 불상이 서있던 자리는 비어있었으나 일제치하인 1939년 장석상 주지 당시 대 시주자의 후원을 받아 김복진 조각가가 불상을 조성하던 중 6.25한국전쟁으로 공정 80% 상태에서 중단됐다. 그러다 1963년 박추담 주지 때 박정희와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복원불사가 재개, 1964년 5월 시멘트 미륵 부처님이 완성됐다.

그러다 1986년 유월탄 주지스님 때 붕괴위험의 시멘트 미륵부처님을 해체하고, 1990년 그 자리에 청동미륵불을 모셨다. 회향식 당시 부처님 뒤편으로 무지개가 나타나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재 미륵불은 2000년 개금불사 이후 2014년 다시 개금불사를 한 것이다.

법주사가 동양 최대 불상을 조성이후 일부사찰은 누워있는 불상 중 가장 큰 불상을 조성하는 등 최대라는 이름이 붙은 불상을 조성하는 것이 붐을 타기도 했다.

청동대불 회향 외에 속리산이 영화(榮華)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바로 1993년 대전 세계엑스포 개최다.

교육부가 대전 엑스포장 견학을 수학여행상품으로 정하면서 전국의 모든 학교들이 대전엑스포장을 찾았다. 당시 대전엑스포장을 견학하고 가까운 속리산에서 숙박한 후 법주사 등 문화재 관람을 수학여행 코스로 잡았다. 그렇잖아도 청동대불 회향으로 관광객이 많았던 대전엑스포로 인해 인도는 물론이고 차도까지 운집된 인파는 법주사를 가는 동안 떠밀려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고 상인들은 회고하고 있다.

적어도 이같은 상황은 1998년 IMF가 터지기 전까지 이어졌다. 속리산의 르네상스가 계속됐던 것이다.

실제로 속리산을 찾은 탐방객 숫자를 보면 통계를 잡기 시작한 1992년 217만9천명의 방문객을 기록한 이후 1997년 202만1천명이 오는 등 연간 200만명 방문 기록을 유지했다.

법주사 청동대불 회향식이 있었던 1990년과 1991년의 통계는 없지만 아마 이 때도 2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속리산을 찾았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다 IMF 때인 1998년 속리산 관광객은 127만여명으로 줄었다. 200만명에서 80만명 가까이 준 것이다. 2005년 이후 110만여명대에서 60만명~70만명대로 크게 추락했다.

갈퀴로 돈을 긁어 포대자루에 담았다?

속리산에서 수십년간 장사를 하는 상인들에 따르면 "통계는 모르지만 88올림픽, 90년 청동대불 회향식, 93년 대전 엑스포까지 이어지는 동안 속리산의 관광은 가장 활성화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상인들은 "그땐 정말 좋았지 그때는 누구네 집 할 것 없이 장사가 잘됐어 식당 기념품, 숙박할 것 없이…."하며 호황을 누렸던 당시를 회고했다.

50년 가까이 기념품점 형제상회를 운영하고 있는 김종영(77)씨의 말 속에서 속리산의 영화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처음 오리숲에서 장사를 했는데 그때는 기념품점이 20개 정도 됐었어. 식당도 20개 정도 되고. 그러다 속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오리숲이 정비되고 상업시설 지구가 조성돼 현재의 위치로 상업시설이 이전했지. 장사가 잘되니까 상가가 아래로 이전하고는 기념품점이나 식당이나 모두 20개씩은 늘어난 것 같어. 나는 찻상 만들어서 팔고 정이품송이나 문장대 등이 프린트된 기념타올, 목탁, 염주를 팔았는데 하루에 돈 십 만원 이상 팔았지. 그때 돈 십만원은 큰돈이었어. 여관도 잘 됐어. 수학여행, 단체여행이 많아서 큰 여관은 한 번에 500~700명씩 들어서 1년이면 7만명 이상 숙박했지. 지금도 철 장사이긴 하지만 그때는 4~6월, 9~11월 1년 열두달 중 다섯, 여섯 달 정도 장사하면 철시했던 때여. 그때 1년에 200만명이 속리산을 찾았으면 얼마나 많은 관광객이 속리산을 찾은 것인지 이해할 수 있지."

김종영씨는 또 "변변한 기념품이 뭐가 있겠어? 산에서 나무 해다가 색칠해서 지팡이를 만들어 팔았는데 그것도 없어서 못팔 정도였어. 그 때는 저녁 6시만 되면 차가 끊기는 교통 오지인데다 자주 오지 못했을 때이니까 품질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관광지에서 기념품을 구입해 추억하려고 하는 심리가 있어서 잘 팔렸던 것 같아"라고 회고했다.

이같이 호황기를 누렸을 때 속리산 상인들은 지금과 같은 금고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돈을 정리할 시간이 없어 아예 포대 자루가 금고로 변신 갈퀴로 긁어모았다는 설이 나와 지금도 그때의 전설이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이에대해 속리산관광협의회 우창제 회장은 "말이 와전된 것 같다"며 "목이 좋았던 몇몇 가게는 매출이 높긴 했지만 전부가 그렇지는 않았다"고 하면서도 "지금보다는 수익 면에서는 더 나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우창제 회장은 "속리산이 충북의 대표 관광지인데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 100선 탈락은 정말 충격적이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선정된 다른 관광지를 보니까 유명 관광지 하나만 갖고 되는 게 아니고 이제는 체험을 할 수 있어야하고 재미있고 흥미를 주는 요소가 있어야 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선호하는 관광 트렌드가 바뀐 것을 잘 읽어서 국민들의 마음을 잡는 관광상품이 개발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우 회장은 "관광 100선으로 당장 부활되지는 않겠지만 국민들이 다시 찾고 더 많이 찾아오는 관광지를 만들기 위해 관광협의회 회원들과 노력하고 있고 특히 올 가을에 개최하는 속리축전과 등반대회부터 좀더 새롭게 해보려고 한다"는 의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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